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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여행

유대인의 결사 항쟁의 상징, 마사다(Masada)

gotond 2013. 5. 26. 01:16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국방군 장관이었던 모세 다이안은 마사다의 고대 신화를 
이스라엘 국방군의 상징으로 보고 신병훈련을 마사다에서 끝마치게 했다.
군대에서 이곳까지 명예스러운 행진을 하며 밤에 이곳을 올라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는 의식을 한다.


이스라엘에서 '마사다'하면 많은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이기에 나름 이 곳을 방문하기에 앞서 다소 의미심장한 마음을 갖게 된다. 렌트한 차에 가족 모두를 태워 의미심장한 마음을 살짝 뒤로 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마사다를 향해 떠나본다.


여리고, 쿰란을 지나 남쪽으로...

예루살렘에서 마사다까지 차로 이동하면 약 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거리로는 약 94Km 정도로 보면 된다. 예루살렘에서 1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광활한 유대 광야가 보이게 되고, 계속 계속 아래로 내려가면 오른편으로 여리고성이 보이게 된다. 그 여리고 도시를 뒤로하여 90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보면 오른 편으로 쿰란 국립공원을 볼 수 있게 된다. 

쿰란은 멀리서 보더라도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는 장소임을 볼 수 있다. 쿰란을 뒤로 하고 한참 달린다. 달리다 보면 광야와 계곡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라 경탄의 연발이 나오게 된다. 차를 타고 거의 사해의 끝까지 가다보면 오른 편으로 계곡에서 뚝하고 떨어져 나온 기둥과도 같은 절벽이 보이게 된다. 지형적 특이함 때문에 누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그 곳이 마사다임을 바로 알게 되는 것 같다.


마사다 케이블카 경비의 야속한 거짓말, "30분이면 문 닫는다."

마침 마사다를 찾아간 날이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이면 샤받(토요일)전이기 때문에 내심 일찍 문을 닫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차를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올라가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경비가 차를 막는다.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기 때문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잠깐의 고민 끝에 그럼 차는 주차하고 둘러보기만 하고 가게다고 하여 겨우 주차장에 주차하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둘러보는데 케이블카가 마사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우리가 둘러보고 있는지 20분 지났나. 혹시나 해서 티켓박스로 가봤는데, 아니 이런 주차장 경비의 말은 야속하게도 거짓말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표를 왕복으로 사서 기대하던 계획대로 마사다 정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마사다는 국립공원이라 입장료를 받는다. 또한 케이블카를 타게 되면 그 가격안에 모두 포함된다. 만약 가족할인카드를 갖고 있다면 입장료를 제외한 케이블카 비용만 계산해서 지불하면 된다. 계산도 카드만 보여주면 티켓 박스에서 다 알아서 해준다. 동반자 중에 어린 아이들이 있다면 케이블카를 탈 것을 권장한다.


사해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마사다에 오르면 정상에서도 관람하는 순서가 따로 있다. 번호를 보면서 안내판을 따라 다니면서 보면 된다. 마사다는 1963년에서 1965년까지 발굴작업이 이뤄졌으며, 오래 동안 사람의 발이 닿기 힘들었던 장소라 보존상태가 아주 잘 되어있다.

그리고 마사다에서는 이스라엘의 광야와 사해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멀리 자동차 경주장도 보인다. 마사다 뒤쪽으로 가면 또 다른 경관을 볼 수 있다. 마사다 정상을 한바퀴를 돌면 왜 이곳이 군사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는지를 감잡을 수 있게 된다.

마사다 정상에서 바라본 사해 전경(위)

마사자 정상에 남아 있는 옛 도로(위)


마사다의 역사 이야기

마사다는 사해 표면에서 약 434m 높이로 우뚝 솟아있으며, 정상 부분의 남북 길이는 600m, 너비 250m, 평균 120m이며, 750,000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 저장고를 가지고 있다.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으로 BC 2세기경 마카비 왕조의 대제사장이던 요나단이 최초로 요새화하였다. 이것을 BC 27~31년에 헤롯왕이 더 견고한 요새로 건축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5.4m, 너비 3.6m으로 마사다 요새 전체를 둘러 쌓고 있었다. 성벽에는 또한 높이 22.5m되는 망대를 37개나 만들었다.

BC 40년 하스몬 왕조의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가 유대를 침공하자 헤롯은 가족들을 약 800여명의 군인과 함께 마사다 요새에 피난시키고 로마로 건너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 왕으로 인정받고 유대로 돌아와 마사다에 피해있는 가족들을 구출하고 BC 37년 유대 왕으로 등극한다.

AD 66년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열심당원들이 기습 공격하여 점거하였다. AD 66년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에서 제1 차 반란이 일어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 전망산에 캠프를 친다. AD 70년 8월에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성 북쪽을 무너뜨리고 헤롯 성전에 불을 지르고 유대인들을 모두 학살하였다.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아 로마 군대가 방화한 불까지 꺼질 정도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967명의 열심당원들이 마사다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게 된다.

AD 72년, 로마의 실바 장군은 로마 10군단 병력 9,000명과 유대인 노예6,000명을 거느리고 마사다로 진격한다. 실바는 비교적 가장 낮은 서쪽 골짜기에 나무와 흙과 돌을 이용해서 토성을 쌓기 시작하여 6개월에 걸쳐 완성한다. 

마사다 요새가 정복당하기 바로 전날 열심당원의 지도자인 엘리에젤 벤 야이르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최후의 연설을 했다.

"용감한 나의 동료들이여! 우리는 오래 전부터 로마를 섬기지 않으며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결코 섬기지 않기로 결심했었소.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참되시고 의로우신 만인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오. 이제 내일이면 우리의 부녀자들은 치욕을 당하며 우리의 자녀들은 노예로 팔여가고 우리는 참혹한 죽음을 당할 것이오. 

우리에게 자유가 있을 때 우리 손에 검이 쥐어졌을 때, 우리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합시다. 로마 군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우리의 죽음을 보고 경탄하도록 하게 합시다."

이에 가장들은 집으로 돌아가 처자식들을 칼로 죽이고, 남자들은 다시 제비를 뽑아 10명을 뽑고, 나머지를 칼로 죽이고, 또 다시 한 명을 뽑아 나머지 9명을 죽이고서 자기는 자결하였다. 이 중에 한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이 지하 동굴에 숨어 있다가 생존하게 되어 마사다의 모든 상황을 로마군에게 전하게 되었고, 이것을 유대인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마사다(위키 백과) 

마사다(히브리어 מצדה, , 요새라는 뜻)는 이스라엘 남쪽, 유대사막 동쪽에 우뚝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를 말한다.

73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끝까지 로마군에 항거하던 유대인 저항군이 로마군의 공격에 패배가 임박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전원 자살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사다는 1842년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굴되었다. 거의 2,000년 동안 이 요새가 사람의 손에 닿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이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험난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관광객의 트래핑을 위한 샛길이 나 있으며 따로 케이블카도 설치되었다. 헤롯왕의 두 개의 궁전과 빗물을 저장했던 거대한 수조, 로마식 목욕탕과 유대 반란군의 막사, 창고 등이 발굴되어 복원 되어있고 로마군이 요새를 둘러서 쌓았던 성채와 그 외곽에 로마군 막사의 유적도 발굴되어 있다.

이스라엘 국방군 장관이었던 모세 다이안은 이곳의 고대 신화를 이스라엘 국방군의 상징으로 보고 신병훈련을 마사다에서 끝마치게 했다. 부대에서 이곳까지 명예스러운 행진을 하며 밤에 이곳을 올라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는 의식을 한다.

2001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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